오늘은 지난 사림파에 대해 알아본 데 이어 밀접한 연관이 있는 훈구파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보겠습니다.
훈구파는 혁명파 사대부를 계승한 세력으로서 세조의 왕위 찬탈에 협조하여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귀족적 관료 학자들을 가리킵니다. 훈구파라는 명칭은 본래 훈구 공신, 훈구대신 등 오랫동안 공로를 많이 세웠다는 의미를 지닌 용어였지만 성종 후반 이후 세력이 확립된 신진 정치 세력인 사림파와 구별하기 위해 역사적 용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훈구파는 세조 찬위를 도운 공신과 충신, 어용학자 및 관학파와 권문세족의 자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높은 관직에 등용되었고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무역에도 관여하고 공물 방납을 통해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공신전을 받아 막대한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상공업의 이익을 독점하고 능란한 문필로 여러 가지 관찬 사업에 참여하여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성종 즉위 이후 사림파의 등장으로 안전에 위협을 받았으나 연산군 때부터 시작된 사화들로 인해 사림파를 숙청하였으며 명종 때 을사사화를 통해 정치적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나 선조 이후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훈구파는 몰락하게 되고 남은 잔존 훈구파들은 대부분 서인에게 흡수됩니다.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 속에서 여러 차례 사화가 발생하였습니다. 사화는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화를 입는 일을 가리키며 한국사에서는 특히 조선 중기에 사림세력이 화를 당한 연산군 때부터 명종 즉위년까지 발생한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이 네 가지의 사화를 4대 사화라고 합니다.
무오사화는 성종 서거 후 작성되는 실록청의 구성에서 비롯된 사화입니다. 성종 때 사관이었던 사림파 김일손은 기록해 둔 사초가 있었고 그 사초를 토대로 작성하는 것이 실록인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시 실록청 당상관으로서 성종실록 편찬의 책임자였던 훈구파 '이극돈'이 미리 사초를 열람하고 자신에 관한 부정적인 내용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길로 김일손을 찾아가 내용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김일손은 들어 주지 않았고 이에 '이극돈'은 정치 공작의 귀재 유자광을 찾아가 모의하여 훈구파 대신들을 움직여 김일손 등이 사초에 궁금 비사를 써서 조정을 비난했다는 내용을 올리게 되고 그것은 연산군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사림파의 왕권 견제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연산군은 사초를 왕에게 올리게 하라는 전대미문의 명을 내리기에 이릅니다. 당시 모친상으로 청도에 있었던 김일손은 서울로 바로 압송되었습니다. 훈구파들은 김일손의 불손한 언행이 스승 김종직의 영향 때문이라 주장했고 사림파의 일망타진에 나섰습니다. 연산군은 사초 사건에 연루된 김일손과 권오복, 권경유 등을 능지처참하고 김종직의 제자들을 대거 유배시켰습니다. 이미 죽은 김종직에게 마저 부관참시를 명하였습니다. 무오사화로 인해 김종직, 김일손으로 대표되는 영남 사림파는 몰락했습니다.
갑자사화는 연산군 때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 씨의 복위 문제로 인하여 일어난 사화입니다. 연산군은 폐비 윤 씨의 복위를 추진하면서 성종 때 폐비를 찬성한 훈구 세력들을 숙청했습니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 씨는 폐출되었다가 사사되었고 연산군이 공표한 갑자사화를 벌인 이유는 이때 윤 씨의 폐비를 찬성한 사람들에 대한 처벌과 복수를 위해서라고 공표하고 있습니다. 인수대비는 연산군의 행위를 꾸짖다가 화병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성종이 윤 씨를 폐출하려 할 때 찬성했던 10여명의 신하를 처형하고 이미 사망한 자들은 부관참시에 처했으며 그 제자와 가족들까지 처벌하였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참혹한 형벌들이 연일 진행되었고 뒤이어 언문 학대까지 하게 되어 국문학 발달도 침체 상태에 빠졌습니다.
기묘사화는 중종 때 훈구 세력이 신진 사림의 핵심 인물들을 몰아내어 죽이거나 혹은 귀양보낸 사건입니다. 연산군 때의 연이은 사화로 유학은 쇠퇴하고 기강도 문란해진 당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함과 동시에 중종반정으로 인해 권력 남용할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사류를 등용하고 성리학을 장려하였습니다. 이때 조광조 등 젊은 선비들이 대거 등용되었습니다. 조광조는 성균관 유생들을 천거를 받아 관직에 임명되고 왕의 두터운 신임도 받아 약 5년간에 걸쳐 정계에서 활약합니다. 이에 불만을 가졌던 훈구파 세력들은 연합하여 조광조 일파를 타도할 계획을 세웁니다. 훈구 세력들은 자식이거나 친분이 있는 후궁들을 이용하여 타도 계획을 적극적으로 이행합니다. 후궁들은 나인들을 시켜 나뭇잎에 꿀을 발라서 벌레들이 파먹게 하고 나뭇잎에 조광조가 왕위에 오른다는 내용이 남게 하는 모의를 하고 홍경주를 필두로 조광조 등이 당파를 만들어 과격한 일을 자행하고 정치를 어지럽게 한다고 중종에게 밀고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조광조는 결국 사약을 받았으며 다른 많은 사림파도 귀양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을사사화는 조선 왕실의 외척들 간의 다툼이 배경이 된 사화입니다. 장경왕후 윤 씨는 인종을 낳고 문정왕후 윤 씨는 명종을 낳았습니다. 이 두 계비는 파평 윤씨인데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은 당시 '대윤'으로 불렸으며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은 '소윤'이라고 불렸습니다. 서로 부원군이 되기 위해 시작된 세력 다툼은 사화로 이어집니다. 인종이 즉위했을 때 대윤이 세력을 잡아 사림의 명사를 많이 등용하였고 일시적으로 사림은 그 기세를 회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종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서거하고 12세 명종이 즉위하면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돼 형세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소윤은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자기 첩 정난정을 이용하여 문정왕후와 명종을 선동케 하는 등 계책을 꾸미고 대윤과 그 일파를 반역 음모죄로 몰아 귀양을 보낸 뒤 죽게 하였습니다. 을사사화의 여파는 그 후 6년에 걸쳐 지속되었고 대윤을 찬양했다거나 등의 갖가지 죄명으로 유배되거나 죽은 자는 100여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연산군 이래의 큰 사화는 이 사화가 마지막이 되었으나 을사사화로 인해 모후 및 외척이 정권을 잡는 길이 열리게 되었고 훈구 세력이 전 정권을 장악하고 사림의 정치적 기반은 더욱 축소되었습니다. 하지만 큰 피해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림파는 향약과 서원을 기반으로 계속 발전하였습니다.
오늘은 사림파에 이어 훈구파와 4대 사화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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