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 일제강점기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무단 통치, 문화 통치, 민족 말살 통치로 이루어졌던 일제강점기 시대 중에서 1919년부터 1932년까지 지속된 문화 통치에 대해 중점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이 시기에는 일본 제국의 공업화가 급진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 내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본이 조선을 일본의 식량 공급지로 만들려는 산미증식계획이 수립되었습니다. 토지를 개량하거나 수리 조합의 역할을 증대하여 미곡 생산량을 늘리려고 시도하였는데 오히려 증산되는 양보다 일본으로 유출되는 양이 많아져 한반도의 식량 부족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거기에 더해 증산 비용을 소작 농민에게 전가해서 식민지 지주제가 더욱 심화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일본 공업 자본이 성장하여 잉여 자본을 이용한 식민지 공업화의 필요성이 커졌습니다. 이때 제사, 면방직 등의 경공업 중소 자본의 투자가 증가하였고 일본에서 일부 대자본의 투자도 있었습니다. 한국인 자본의 회사와 공장 등도 발전했는데 이에 따라 한국인 노동자 수도 증가하였습니다. 이때 임금 차별과 열악한 노동환경은 노동쟁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요릿집과 백화점이 유행하였습니다. 국일관이나 화신백화점 등은 8도를 중심으로 대도시에 지점
을 둘 정도로 유명하였습니다. 백화점의 등장으로 송상, 유상, 만상 등 상인들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영화관도 등장하였는데 군청 소재지, 부청 소재지, 읍소재지 등 시장이 존재하는 규모가 큰 곳에 있었습니다.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도 말과 단어는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화관에 출입하였습니다. 이후에는 텔레비전의 보급도 있었습니다. 라디오의 보급은 구한 말 이후에 확산하였으나 텔레비전의 구입은 쉽지 않았기 때문에 텔레비전이 있는 집은 마을의 공회당처럼 활용되었습니다. 경성 내부에 있던 서양식 호텔이 경성부의 조선호텔, 신라호텔 등을 시작으로 각지의 지방 대도시로 호텔과 모텔이 확산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여관이나 여인숙, 민박 등이 확산하였습니다. 또한 일제 공무원과 군사 경찰 보조원의 등의 일제 관료에 많은 응시생이 응시하였습니다. 순사직 경쟁률은 처음에는 크게 높지 않았으나 문화정치가 본격화하면서 경쟁률이 10 대 1까지 올라갔습니다.
1920년대에 들어 서양의 문물이 점차 확산하고 양반들만 취급하던 양복과 정장, 드레스, 원피스 등이 시중에도 확산하여 중소도시의 중산층과 평민층에도 퍼지게 되었습니다.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은 신여성과 모던보이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유교적 규범이 수그러든 자리에 사랑과 연애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현대의 사랑과는 달리 신여성과 모던보이들은 사랑에 미쳐 죽는 것을 절대미의 극치로 칭송하여 연애에 목숨을 바치는 정사 사건이 자주 발생하였습니다. 신문물과 연애 사조의 확산과 함께 이혼도 등장하였습니다. 도교 유학생이 늘어나던 당시에 구시대 여성과 결혼한 남성들이 신여성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생긴 현상이었습니다. 제2의 부인이라는 표현도 등장하였는데 신여성들이 적당한 상대를 찾지 못해 첩이나 둘째 부인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남편의 부족을 이유로 여자 편에서 이혼소송을 하는 경우도 늘어났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하는 남편이 집을 나가서는 들어오지 않아 여자가 이혼을 요구하거나 독립운동 등 정치적인 이유로 남편이 귀가하지 않아 가정이 파탄 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3.1운동 이후에는 각 지역의 정부 통합 운동이 펼쳐졌습니다.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상하이 임시정부가 해산한 후에 13도 국민대표회의로 수립된 한성 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발족시켰습니다. 초반 임시 정부는 대통령제를 표방하여 초대 대통령을 이승만으로 하였습니다. 이승만은 외교로서 독립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임시 정부는 파리 강화회의나 워싱턴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을 주장했으나 열강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성과는 미미했습니다. 외교 활동으로 인한 성과가 미미하고 이러한 위기 속에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이 상하이에 알려졌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모였던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이탈하였습니다. 임시정부는 인족의 대표기관의 명맥을 잃게 되었고 김구의 활약으로 다시 활성화되는 데까지 오랜 침체기를 가졌습니다. 간도와 연해주, 만주 등의 지역을 기반으로 조직된 항일 무장 단체들은 3.1 운동을 계기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국경지방에서 격렬한 무장 투쟁을 벌였습니다. 일제는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독립군을 토벌하려 했습니다. 일본은 국경 지방 독립군의 뿌리를 뽑지 않고는 조선을 지배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홍범도 부대는 북간도에서 봉오동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들어온 일본군을 전멸시키고 김좌진 장군도 후퇴를 거듭하면서도 1,500명의 일본군 사상자를 내는 등 성과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공격으로 후퇴한 소련에서 각 부대는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두고 서로 대립하게 되고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무장 독립운동 세력들은 다시 결집하기 위해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로 구성된 3부를 조직하여 재정비하려고 하였으나 일본제국과 만주 군벌이 미쓰야 협정을 체결하면서 만주에서 하는 무장 독립운동도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혼란 속에서도 항일 투쟁은 꾸준히 전개되었고 6.10만세사건, 광주학생운동 등으로 일본에 타격을 해주었고 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되어 국내외에서 일본 요인의 암살 및 파괴 활동을 적극적으로 펴나갔습니다.
독립의 길은 실력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깨닫고 배우며 실력의 양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 민족경제를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한반도에서 나는 물산을 구매해줄 것을 호소하며 국산품 애용 운동을 펼쳤습니다. 김성수, 윤치호, 이광수, 조만식 등도 강연, 계몽 활동을 나리면서 국산 물건, 국내에서 나는 물품을 애용해달라고 호소하며 물산장려운동을 펼쳤습니다. 또한 발기인을 확보하여 민립대학 기성회를 출범시키고 모금 활동을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였습니다. 김성수, 송진우 등은 자치화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인 '연정회'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문화정치에 맞춘 일제와의 타협 속에 추진된 것으로 비타협 민족 세력의 반발로 중단되었습니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으로 공산주의 사상이 국내에 퍼지게 되면서 사회주의 단체가 많이 조직되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대중운동을 지도하면서 공산당 건설에 힘을 쏟았습니다. 조선공산당을 결성하면서 공산주의 운동을 더욱 활발하게 전개합니다. 6.10만세 운동도 천주 도교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의 연대로 일어난 운동입니다. 사회주의 세력은 정우회 선언을 통해 우경화되고 민족주의 세력은 조선 민흥회를 결성하였습니다. 민족주의자들이 타협적인 민족 개량주의자와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으로 나뉘자 사회주의자들은 비타협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신간회를 결성하였습니다. 신간회 본부는 당시 활발하게 벌어지던 여러 가지 대중운동을 주도하거나 지원했습니다. 광주에서 일어난 광주 학생 항일운동의 신상을 파악하고 서울에서 대규모 민중대회를 준비하여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발전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신간회는 민중 대회 사건으로 일본에 빌미를 주어 핵심 간부 40명이 체포되고 점차 활동이 줄어들다가 사회주의자들의 주도로 해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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