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을미사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조선 후기에 들어 한일전쟁 이후 승리한 조선에 대해 러시아는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고 지배를 더욱 강화하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친일 내각의 세력이 컸고 그 중심에는 김홍집과 흥선대원군 등이 있었습니다. 이에 명성황후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축출하고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명성황후의 행보에 앙심을 품은 일본 정부는 '미우라 고로'를 이용하여 명성황후 암살을 명령하였고 조선 측에도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 이주회, 유길준, 구연수 그리 흥선대원군 등이 친일 세력들이 정치적인 목적을 띄고 일본에 협조하고 내통하였습니다.
'미우라 고로'는 왕실을 회유하여 경계심을 없애기 위해 일본 왕궁 방문 후 조선 왕실의 안전을 확보한다고 약속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에서 고가의 선물까지 바치며 명성황후시해사건을 치밀하게 준비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의 '고무라'의 딸을 명성황후의 양녀로 삼게 하여 명성황후의 신원을 확인하도록 하였습니다.
미우라는 명성황후시해사건을 표면적으로 흥선대원군과 조선훈련대의 반란으로 꾸미고 시해 범행은 일본 낭인들이 맡게 하며 일본인 가담자는 낭인 자객, 일본 수비대 군인, 일본 공사관 순사들로 구성하는 등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10월 10일 새벽으로 구체적인 날짜와 시간을 정하고 미우라는 명성황후 시해 계획을 '여우 사냥'이라고 불렀습니다. 조선 정부가 훈련대의 해산을 명령한 시각은 10월 7일 새벽 2시경이었습니다. 군부 대신은 이 사실을 미우라에게 알려주었고 이에 거사 날짜가 바뀌게 됩니다. 미우라는 거사 계획서를 영사 관보인 '호리쿠치 구마이치' 에게 주고 용산으로 가서 거사 준비를 지시합니다. 이에 따라 한성신보 직원들과 낭인들이 칼과 총을 들고 용산으로 모였습니다. 또한 영사관 순사들을 사복에 칼을 들고 용산에 집결하도록 하고 이주회에게 이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별장 공덕리로 가서 흥선대원군을 궁으로 출발시키고 일본 순사가 조선인의 옷을 입게 하여 조선인으로 위장했습니다. 이때가 새벽 세 시 경이었습니다. 일본 수비대 제1중대와 제3중대가 광화문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수비대 제2중대장은 훈련대를 인솔하여 경복궁 동북 문 부근에 집결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리 경복궁을 포위하고 있다가 광화문 쪽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궁궐 담을 넘어 근정전을 지나 명성황후의 거처인 건청궁으로 돌진했습니다. 고종의 호위 경관들은 별 군관에게 광화문 앞에 일본군과 조선군 훈련대가 집결되어 있다고 보고하였으나 시간이 지나 경복궁의 동북 문과 서북 문은 포위된 상태였고 근정전 일대까지 총격전이 벌어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일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경복궁 곳곳을 뒤져 건청궁 일대에서 명성황후를 찾았습니다. 고종은 일본군이 궁궐을 포위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이범진에서 최대한 빨리 미국 공사관과 러시아 공사관에 도움을 요청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범진은 미국 공사관을 거쳐 러시아 공사관에 찾아가 일본군에 궁이 포위되었음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일본인 교관에서 훈련받은 조선군은 일본인 교관의 인솔을 받으며 뭔가 논의하였고 그 뒤 한 조선인이 큰소리로 대문을 열어달라고 외쳤습니다. 광화문을 지키던 순검들과 경비병은 이에 저항하였고 삽시간에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새벽 5시경 흥선대원군의 일행이 광화문 앞에 이르렀고 일본 순사들은 광화문 담을 넘어 경복궁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담을 넘은 일본인 폭도들이 궁궐 경비병에게 총을 쏘니 경비병들은 무기와 군복을 벗어 던지고 달아나기도 하였습니다. 경복궁 입구에는 미국인 지휘관 윌리엄 다이가 지휘하는 조선의 경비대가 지키고 있었으나 일본의 낭인들과 조선인 병력은 쉽게 경비대를 격퇴하고 경복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윌리엄 다이'는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지만 결국 경비대를 이끌고 도망쳤습니다. 고종을 호위하고 있던 러시아인 건축기사 사바틴은 일본인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호위를 요청하고 그곳에서 사건을 목격하다가 명성황후 시해 직전에 두들겨 맞다가 현장에서 쫓겨납니다. 사바틴과 다이는 이후 일본인들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며 사건에 대해 증언하였습니다. 고종은 흉도들의 주의를 돌려 명성황후의 피신을 돕기 위해 밀실의 뒷문을 모두 열어놓고 폭도들이 잘 보이는 방문 앞에 나와 있었습니다. 흉도들은 칼날을 휘두르며 그 방에 들어가 고종의 어깨의 팔을 끌고 다니기도 하고 고종 옆에서 권총을 쏘며 궁녀들을 난타했습니다. 또한 무단침입을 꾸짖은 고종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무례한 행동도 일삼았으며 태자 역시 다른 방에서 붙잡혀 머리채를 휘둘리고 칼등으로 목덜미를 얻어맞는 등 각종 수모를 당했습니다.
경복궁에 명성황후가 없는 것을 알게 된 흉도들은 그녀가 기거하던 건청궁에 들어가 문을 포위하고 명성황후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폭도들은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끌며 명성황후가 있는 곳을 대라며 소리를 지르고 난폭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궁녀들은 흉도들에 두들겨 맞고 내던져지면서도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건청궁 곤녕합에 진입한 낭인과 조선인 협력자들은 궁녀와 상궁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누가 명성황후인지 찾아내던 중 변복한 황후를 색출하여 살해했습니다. 낭인들은 궁녀를 사이에 숨었다가 도망치는 명성황후를 쫓아가 그녀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리고 내동댕이친 후 맨발로 밟고 칼로 찌르는 등 잔혹하게 살해하였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있고 다음 날 아침은 고종은 건청궁에 있는 장안당으로 갔습니다. 고종은 미우라를 불렀고 소식을 전해 들은 미국과 러시아의 공사도 궁으로 왔습니다. 미우라는 서기관과 통역관을 데리고 궁으로 들어갔고 고종의 옆에는 흥선대원군도 있었습니다. 미우라는 고종을 협박해서 김홍집 친일 내각을 성립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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