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 조선 후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철종 이후 흥선군의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흥선대원군은 막강한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쇠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처음 권력을 잡았을 때 가장 먼저 한 것은 세도정치를 무너뜨린 것이었습니다. 나라를 엉망으로 만든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무너뜨린 후 백성들의 분노를 사고 있던 조세제도를 개혁하였습니다. 관에서 관리하는 백성 구휼 기구였던 환곡제와 다르게 민간에서 관리하고 양반 지주들이 자치적으로 곡식을 백성들에게 대여해 주는 사창제로 전환하였습니다. 군역 제도도 정비하여 양반에게까지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왕권 강화의 한 방법으로 비변사를 완전히 축소하여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하고 '대전회통'을 편찬해서 법전을 재정비하였습니다. 서원을 철폐하여 유생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왕권 강화가 나라를 바로 세우는 데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재정 상태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때 불타 소실된 경복궁을 재건축하는 데 재정을 투입하였습니다. 경복궁의 중건 외에도 각 관서와 도성, 북한산성의 수축도 함께 진행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황폐해졌던 한양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지만, 한양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이 세금과 강제 노동으로 큰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강하게 탄압하였습니다. 프랑스인 성직자들과 천주교를 믿는 조선의 백성 수천여 명을 병인박해에서 처형했습니다. 프랑스는 자국의 성직자가 피살된 것을 이유로 군대를 보내 강화도를 공격하였습니다. 조선에 대해 사과와 손해배상까지 청구하였고 통상을 요구하였습니다. 프랑스 군대는 강화도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강화도에서 재물과 의궤들을 약탈하여 철수하였는데 이 사건이 '병인양요'입니다. 5년 후 조선에는 미국에 의해 다시 침략받는 '신미양요'가 일어납니다. 당시 미국 상인이 대동강에서 난동을 피우던 중 배가 불에 탄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추궁하며 사과와 배상, 교섭을 요구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미군은 강화도를 공격하여 조선군을 전멸시키고 미국으로 철수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전국 곳곳에 세우며 서양 오랑캐와의 화친은 나라를 팔아넘기는 것과 같다는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이후 더욱 강력하게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펼쳤고 이 때문에 그의 집권 당시에는 경제와 사회적인 발전이 없었습니다.
이후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겠다는 친정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정권에서 밀려나게 되고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여흥 민씨 세력이 집권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통상 개화론자들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조선과의 평화적인 교섭을 포기하고 강화도에서 운요호 사건을 일으킵니다. 일본은 이러한 무력을 바탕으로 조선에 개항을 강요하였습니다. 조선 내부에서 찬성과 반대로 의견이 갈렸지만 결국 개항 찬성론자들의 입지가 강화되어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하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은 이 조약을 체결한 후부터 국내에 세력을 확장하여 협박과 간사한 꾀를 쓰며 조선을 압박하였고 결국 한국의 주권을 강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고종은 일본에 파견한 사신 김홍집이 들여온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읽고 난 후 깊은 인상을 받아 조선 조정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파 인물을 등용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개화 후 조선 조정에서는 개화 정책을 담당하기 위한 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두고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습니다. 미국과 국교를 시작하고 뒤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양 열강들과 외교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나라들과 맺는 조약들은 모두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치외 법권을 규정하고 국내 산업에 대한 보호 조치를 거의 취할 수 없는 규정들이었습니다. 개화 정책에 대해 보수적인 의견을 갖고 있던 유생들은 성리학을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 운동은 외세의 침략을 막고 전통적인 사회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유생들과 유교 문화를 계승하면서 서양의 물질문명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자는 혁신적인 인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며 개화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조정의 개화 정책 추진과 유생층의 위정척사 운동은 청나라, 일본, 러시아 이 세 나라로 대표되는 열강의 각축 경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습니다. 근대 문물을 수용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는 등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자 농민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고 일본의 강제 쌀 수탈 등 경제적인 침탈로 농촌경제는 바닥을 치게 되었습니다. 농민들의 불만은 높아져 갔고 당시 정치, 사회에 대해 의식 수준이 높아진 농촌 지식인들과 농민들 사이에는 사회 변화가 절실하였습니다.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은 이런 농민들의 개혁 요구에 들어맞았고 농민들은 동학을 기반으로 대규모의 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 농민군은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을 내세워 전라도 일대를 공격하고 전주를 점령합니다.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일본은 자국민 보호를 핑계로 같이 군사를 파견하였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농민군과 조정은 전주화약을 맺습니다. 농민군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조정에 '폐정 개혁 12개 조를 건의하고 조정도 중앙에 교정청을 설치하여 개혁을 실천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봉기가 진압되었다는 조정을 발표를 무시하고 일본은 기습적으로 경복궁을 습격하는 갑오 왜란을 일으킵니다. 일본은 교정청을 폐지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김홍집과 친일 인사로 전주화약에 간섭하며 갑오개혁을 실행합니다. 이에 농민군은 외세를 몰아낼 목적으로 다시 봉기하여 서울로 북상하였습니다. 하지만 우금치 전투에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조선 관군과 일본군의 협공으로 패배하였고 전봉준을 포함한 지휘부가 체포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는 명분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무력 충돌까지 발생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청일전쟁입니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는 일본에 패하게 되고 일본은 조선을 청나라로부터 완전히 단절시키고 요동 반도를 받아내어 만주 침략의 기반을 마련합니다. 일본의 세력 확장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와 함께 일에 대한 간섭을 시작하였습니다. 고종 역시 일본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미국, 러시아 등과 김윤식, 이범진 등으로 새로운 친러 내각을 구성하고 반일 정책을 계획하였습니다. 한편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의 삼국에 간섭받고 일본은 결국 요동 반도를 잃게 됩니다. 러시아는 조선에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는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조선에 친일 정권을 세우기 위해 일본군 수비대와 대륙 낭인을 소집해 경복궁에 침입시킨 후 친러시아파였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일으킵니다. 이때 김홍집을 중심으로 새로운 친일 내각이 구성되었고 그는 단발령을 시행하여 전국에 있는 백성과 유생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미국과 러시아인에게 목격된 명성황후 살해사건은 국제적인 문제가 비난 여론을 받고 살해의 주동자인 미우라 공사 등은 재판에 회부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조선에서 반일 감정이 극대화되어 '을미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을 중심으로 의병이 봉기하여 친일파와 일본 민간인들을 공격하고 전국 각지에서 일본군과 의병들의 교전이 발생했습니다. 일본군이 의병 학살로 한양을 비우자 고종은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습니다. 이후 고종은 덕수궁으로 환궁하고 얼마 후 대한제국을 선포함으로써 국호로서의 조선은 다시는 쓰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조선 후기 다양한 사건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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