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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조선 중기>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by 다인ING 2022.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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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에는 내부적으로는 사림파와 훈구파가 대립한 여러 차례 사화들과 외부적으로는 왜구의 잦는 침입이 있었습니다. 연산군의 폭정에 중종반정이 일어나게 되어 중종은 왕에 즉위합니다. 이 사건이 중종반정입니다. 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보다는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중종은 조광조 등 사림파를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유교를 기반으로 한 개혁 정치를 하였습니다.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 정책은 초반에는 중종의 신임과 지지를 받았으나 보수적인 기득권층이었던 훈구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나중에는 중종의 지지마저 잃게 되었습니다. 결국 중종은 조광조를 포함한 여러 사림파를 잡아들였고 그들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즉위한 명종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때 을사사화가 일어났는데 문정왕후의 동생인 소윤이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을 공격하면서 외척 간의 세력다툼이 사화로 번진 사건입니다. 이때는 섭정이 지속되어 정국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이후 즉위한 선조는 이황, 이이 등 사림세력을 다시 등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조는 사림파를 통해 약화한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기묘사화 때 희생당한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유학자를 복귀시켰습니다. 훈구파 세력이었던 윤원형 일파는 대역죄로 잡아들여 관직을 파하고 민심 안정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후 사림파는 김효원을 지지하는 동인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서인으로 나뉘어 붕당이 형성되었습니다. 여러 차례 사화를 겪었으나 향약과 서원을 토대로 꾸준히 발전해 나간 사림파는 선조 때 다시 정계로 복귀하였으나 사림파 속에서도 당쟁이 일어나게 되면서 정치 다툼은 되풀이 되게 됩니다. 

 

조선 시대 때 양반 관리들은 국가로부터 땅을 받았고 이외에도 공신에게 주는 '공신전', 고려 시대부터 승직이나 지리 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주던 '별사전' 등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토지들은 모두 세습이 가능했고 3대까지도 세습되었습니다. 양반 관리들은 매입이나 겸병, 개간 등을 통해서도 그들의 소유지를 확대해 나갔습니다. 현직, 전직의 관료들에게만 토지를 주어 세습된 토지를 없애고 현직 관료들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였던 직전법까지 폐지되면서 그들은 농장을 점차 확대해 나갔고 땅을 잃고 유망한 농민이 증가하자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양반 관리들은 이뿐만 아니라 사치를 위한 지방 특산물이나 수공업 제품의 공납과 진상도 받았으며 이는 농민들의 큰 공통이었습니다.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사림파의 이이는 공물의 세목을 쌀로 통합하여 납부하게 하는 수미법을 건의하였지만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환곡은 조선시대에 있던 구휼제도인데 흉년 또는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풍년, 추수기에 돌려받는 진휼 제도였습니다. 이 제도는 원래 의창이 담당하던 일이었지만 제구실을 다 하지 못하여 상평창이 이어 맡았습니다. 점차 농민 구휼 정책이었던 환곡은 변질하여 갔습니다. 

 

외부적으로도 시련이 많았던 조선 중기에서는 여러 차례 일본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선조 때부터 약 6년간 이어져 온 일본과의 전쟁으로 이것이 임진왜란입니다. 일본에서 새롭게 정권을 차지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20만 병력을 동원해 조선을 침략하기에 이릅니다. 조선군은 일본의 전력을 따라잡지 못하였습니다. 백병전 능력도 일본에 비해 부족했고 당시 일본의 신무기였던 조총에 조선군은 압도당했습니다.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함락되고 상주, 충주에 진을 치고 있던 군대 역시 궤멸당합니다.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쳤고 압록강 변에 있는 의주로 피난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조선을 침략한  지 20여일 만에 한양에 들어오게 되고 평양까지 점령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이 지휘하고 있던 옥포, 사천, 한산도 해전에서 일본군은 격파당했고 수군을 통한 물자 보급이 어려워진 일본군은 북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행주대첩이라고 불리는 행주산성에서의 권율과의 대전에서 크게 패하였고 조선 각지에서 의병과 관군이 반격하면서 그 기세가 꺾이게 됩니다. 명나라에서도 지원받기 시작하여 경상도 해안 일대까지 일본군을 후퇴시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5년간의 짧은 휴전 이후 2차 침략인 정유재란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칠전량'에서 조선 수군을 상대로 승리하였으나 이순신이 이끄는 명량해전에서 참패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으로 죽게 되면서 일본군은 철수하고 임진왜란도 끝났으나 마지막 노량 대첩에서 이순신은 총에 맞아 전사하였습니다. 

 

선조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일본과 긴 두 차례의 전쟁 후 피폐해진 국토를 정비하기 위해 사림 정치를 배척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들을 훈련하게 해 국방을 강화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동안 여러 차례 발생했던 전란들로 인해 노비문서와 군적 같은 것이 모두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도망 노비와 유랑민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의 신분제 붕괴를 가져오는 배경이 됩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직후 조정에 곡식과 금전 등을 내고 관직을 사는 공명첩과 선무 군관 등의 임명장을 발행하여 조정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전란 중의 호적 자료의 많은 소실로 일부 부유한 상인들과 농민들은 가난한 양반의 족보를 사들이었나 위조하는 사건들이 자주 발생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전후로 사료를 보강하고 공이 있는 노비와 양인들에게는 역을 면제하거나 관식을 수여하였습니다. 또한 전쟁 후유증을 줄이기 위해 백성 구휼과 부역 면제 등의 시책을 펼쳐 화재로 인한 것을 재정비하였습니다. 실리를 중시했던 광해군은 중립적인 외교를 펼쳐 새롭게 떠오르는 청나라와 지고 있는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쳤습니다.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는 북인에게 밀려 정계에서 배척되었던 서인과 남인은 권력을 되찾기 위해 연합하여 인조반정을 일으키고 광해군을 몰아냅니다. 인조는 서인과 남인에 의해 즉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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