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학

<임진왜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by 다인ING 2022. 5. 25.
반응형

 

오늘은 임진왜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조선에 평화가 지속되면서 국방과 무는 약화해 갔습니다. 특히 선조 때에 조선의 국방력은 최약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시대 통일로 인해 군사력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습니다. 또한 조총을 들여오면서 잘 훈련된 군대를 보유한 상태였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리나라를 거쳐 중국에 진출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이런 일본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조선을 사신을 파견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파견하였던 통신사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내세웁니다. 황윤길은 일본의 공격이 있을 것 같으니 대비를 해야 한다고 하고 김성일은 전혀 침략의 기미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정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김성일의 낙관론을 받아들입니다. 

 

결국 황윤길의 예상대로 일본은 조선을 침략합니다. 처음 침략을 받은 곳은 부산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부산진성 안의 조선인 3,000여명을 살해한 뒤 동래 지역을 침략합니다. 송상현이 있던 동래에서 나름 치열한 접전이 이어졌으나 반나절 만에 동래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일본군은 높은 기세로 한양에 진출합니다. 선조는 신립 장군의 기병 부대를 보내 일본군을 막게 하였습니다. 신립의 부하들은 한양으로 가는 지름길인 조령에서 왜군을 막기 위해 탄금대에 강을 등지고 배수진을 치기로 하였습니다. 탄금대는 평야였지만 논밭이 많아 말이 달리기 힘든 지대였고 전투 당일 비가 내리면서 더욱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국 선조가 최후의 수단으로 내놓았던 신립의 부대마저 일본군에 패하게 됩니다. 

 

신립의 부대가 패하자 선조는 급하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개성으로 피난합니다. 신하들마저 많이 도망친 상태였기 때문에 선조를 따르는 자는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초라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왕이 떠나자 궁궐에는 자신들을 버렸다며 분노에 찬 백성들의 습격이 이어졌습니다. 이때 노비 문서를 보관하고 있던 관청에 화재가 발생하여 많은 호적이나 노비 문서들이 불탔습니다. 선조를 잡기 위해 한양에 입성한 일본군은 달아난 선조를 따라 북쪽으로 그를 뒤쫓기 시작하고 선조도 평양으로 다시 옮겨갔습니다. 선조가 이미 졌다고 생각했을 때 일본군의 북상이 멈추게 됩니다. 

 

당시 일본의 계획은 육군과 수군이 동시에 협공하는 수륙병진 작전이었습니다. 육지에서 진격한 군대가 고립되지 않도록 물길을 통해 군수물자를 보급하려는 전략이었고 그 수로는 이순신이 지키고 있던 전라도 물길이었습니다.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군에 맞서 결사 항전을 치릅니다. 당시 일본 수군의 기본적인 전투 방식은 적군의 배에 침입해 몸으로 싸우는 백병전이었고 조총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이 개발한 판옥선에 일본군은 쉽게 올라타지 못했습니다. 일본군이 당황하는 사이에 조선의 수군이 일본군의 배를 포위하고 배의 높은 쪽에서 화포를 발사하는 전술을 펼쳤습니다. 화포뿐만 아니라 판옥선 위에서의 화살 공격까지 합세 되어 처음으로 일본군은 조선군에 패하게 됩니다. 한산도 대첩으로 알려진 일본군에 대항해 첫 승리를 거둔 대전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물길이 막혀 군사 물품을 보급받지 못하게 된 일본군은 평양에서 더 진격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육지에 있던 조선의 병사들도 힘을 내기 시작합니다. 곽재우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납니다. 의병은 정식 군인이 아니기 때문에 수적으로나 무기 등 많은 부분에서 일본군의 열세였습니다. 그래서 정면 돌파를 하기보다는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서 일본군을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였습니다. 미리 강바닥에 말뚝을 박아놓고 배가 뒤집히면 화살을 쏘는 방식으로 군수물자를 보급하던 수송부대를 공격하였고 이 방식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심리전에서 능했던 곽재우는 병사 10명에게 자신과 똑같은 붉은 옷을 입혀 일본군에 곽재우가 여러 명이라는 혼란을 심어주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의 수군과 육군의 활약으로 조선은 반전의 분위기를 가져옵니다. 명나라의 원병까지 받게 되어 전세는 안정되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는 일본의 기세를 견제하였고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일본과 강화정책을 추진합니다. 일본은 터무니없는 조건으로 협상하려고 했고 결국 조선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협상이 불가능해지자 다시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정유년에 일본은 조선을 다시 침략했고 이 2차 침략을 정유재란이라고 합니다. 

 

조선의 수군에게 패했던 일본군은 초반 목표를 이순신 장군을 제압하는 것으로 정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이순신을 음해하려는 세력에 의해 이순신은 관직을 박탈당합니다. 이에 선조는 당시 신임을 받던 원균을 보냈으나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은 대패하고 조선의 판옥선은 무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패전 후 남은 판옥선은 12척에 불과했고 조정은 다시 이순신을 불러들였습니다. 일본은 300척의 함선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합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해협이 좁아 한꺼번에 적의 함선이 들어 올 수 없는 것과 조류가 빠른 명량의 특성을 이용해 전술을 펼칩니다. 불가능할 것 같던 일본과의 전투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하였고 이것이 바로 명량대첩입니다. 이 전투에서 조선은 승리했으나 이순신 장군은 전사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일본군의 철수로 종전됩니다. 

 

오늘은 조선 중기에 있었던 왜구의 큰 침입 임진왜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