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조선 중기 정치 집단에서 빠질 수 없는 사림파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사림파는 15세기 이후에 조선 중기 중앙 정계를 주도한 집단으로 사림이란 전원의 산림에서 유학을 공부하는 문인, 학자를 뜻합니다. 사림은 고려 말부터 지방의 중소 지주 출신 사대부 가운데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지방에서 영향력의 행사하던 세력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선 건국 당시에 역성혁명을 반대하고 주로 향촌 사회에서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또한 유림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온건파 사대부를 계승했습니다. 고려 말의 유학자 '길재'는 은퇴하고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는데 그 결과 영남 일대에 그의 제자가 많이 배출되어 조선 유학의 주류를 이루었고 훈구파에 맞서 사림파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성종은 합리적이고 온건한 유교 정치를 회복하기 위해 영남 출신의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을 등용하였고 그것을 계기로 사림파는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사림파는 대개 유교의 이상 정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고 당시 정계에 뿌리박고 있던 훈구파와 대립하여 조선 사회에 새로운 활기와 파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림파는 언론 기관에 배치되었고 성종은 이들을 통해 정책을 비판하도록 하였습니다. 사림은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여 훈구세력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공론 정치를 유도하였습니다. 사림의 세력이 확대되자 사림과 훈구 세력 간의 정치적 견제가 점차 심화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림을 지지하던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훈구 세력은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을 일으키며 사림을 숙청하였습니다. 중종반정 이후 사림이 다시 등용되어 조광조를 중심으로 유교적 이상 정치를 펼치고자 하였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로 기묘사화가 발생, 명종 때는 훈구 세력과 외척 세력의 견제로 을사사화가 일어나는 등 또다시 대규모 숙청으로 인한 피해를 보았습니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도 사림은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한 사림파는 꾸준히 그 학통을 계속하면서 발전해 나갔습니다.
사림세력은 조선의 건국에 협력하지 않고 지방에 내려간 학자들로서 중소 지주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던 훈구 세력과는 달리 생업에 힘쓰며 학문을 해야 했기 때문에 훈구 세력보다 경제적 기반이 취약했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농사직설과 같은 농업 관련 책이 간행되고 목화와 약초 등의 재배가 널리 퍼지면서 농산물을 사고파는 시장이 발달하여 전국적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이때 이모작이 성행하여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중소 지주인 사림도 경제적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농민과 공존하는 안정된 농촌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훈구 세력은 권력을 이용하여 광대한 농장과 많은 노비를 소유하는 등 재산을 더욱 크게 늘렸습니다.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신진 사대부들은 향촌에 살면서 중소 지주로서 학문과 교육에 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사림들은 유향소를 구성하여 지방의 백성들을 교화하고 수령의 자문에 응하는 등 향촌의 행정을 도왔습니다. 사림은 향약을 보급하는 데 힘썼는데 향약이란 조선시대 향촌 사회의 자치 규약으로 조선 중기 지방 사림이 농민, 노비 등 하층민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유교 윤리를 기반으로 향촌의 공동 조직을 재구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향약을 통해 동네에서 자발적으로 만들어 시행해 오던 계의 운영방식을 향약 속에 흡수시켜 가난한 농민들이 생활 안정을 돕고자 했으며 향약은 서원과 함께 향촌 사회에서 사림의 지위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서원 역시 사림에게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사림은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불교와 같은 다른 사상을 철저하게 배척하였습니다. 사림은 효과 충을 매우 중요시했고 백성들에게 성리학을 권장하고 성리학의 윤리 교과서인 소학을 보급하였습니다. 사림은 서원을 세워 덕망이 높은 유학자를 양성하면서 지방의 양반 자제들도 함께 교육했습니다. 서원은 국가로부터 토지, 노비, 서적 등을 지급받았고 면세받았습니다. 이후 서원은 성리학 발전의 산실로써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늘어났습니다. 서원은 교육과 학문 발전에 기여하였고 당파끼리의 결속을 강화하여 붕당 정치의 토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선조는 인격이 훌륭하고 덕망이 높은 사람을 등용하여 사림 세력이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림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내부의 분열로 붕당의 대립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붕당이 처음 출현하게 된 것은 '이조전랑'이 배경에 있습니다. '이조전랑'은 조선 시대에 이조의 정랑과 좌랑을 함께 부르던 말이라고 합니다. 이조의 정랑과 좌랑은 관원을 천거 및 전형하는 권한을 가진 직책을 뜻하는 말로 '전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인사권을 갖고 있던 '이조전랑'의 임명 문제와 공론을 둘러싸고 사림 정권이 신진 관료 및 김효원을 비롯한 동인과 기성 관료 및 심의겸을 필두로 하는 서인으로 나누어져 붕당이 형성되었습니다. 이조전랑은 삼사의 관리에 대한 인사권을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 후임을 추천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삼사의 관리들은 언론을 통해 이조 전랑을 지원하였습니다. 이후 붕당정치는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의 사색당파의 이념 다툼으로 변질하였고 숙종 때는 피바람을 동반한 환국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조선 중기에서도 붕당정치의 시초가 된 사림파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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