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도 고려에 대해 더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고려의 네 번째 왕인 광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태조를 이은 혜종과 정종 때에는 황권이 불안정하여 외척들과 황족들 사이에서 계승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왕권의 불안정은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신라 호족 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사용했던 혼인 정책 때문에 나타난 부작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광종은 황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하고 국가의 수입 기반을 확대하였습니다. 이로써 호족이나 공신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이 약화하였고 노비들은 양민이 되어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지게 됨으로써 국가의 재정 기반과 황권이 안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고려 귀족에 의해 한계가 있었습니다. 노비환천법이 최승로에 의해 시행되어 노비안검법으로 풀려난 자들이 도로 노비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광종은 문예와 유교 경전을 시험하여 문반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 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과거 제도는 공신의 자제를 우선으로 등용하던 기존의 등용 제도를 억제하고 새로운 관리 선발 기준을 마련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광종은 유학을 다녀온 신진 인사관리를 등용하여 신구 세력의 교체를 도모하였습니다. 이것은 문치주의로 전환한 표시로 무신 대신 문신을 관리로 등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제도의 실시는 왕권 강화를 위한 새로운 관료 체제 설정의 기초 작업이 되었습니다. 여러 개혁을 통해 자신감을 갖게 된 광종은 본격적으로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러한 개혁들은 왕조 성립 초기의 공신과 호족 세력이 크게 약화하고 왕권이 강화될 수 있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광종의 개혁은 경종 때의 경제 개편으로 이어져 중앙 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기 위한 전시과 제도가 실시되었고 성종 때의 지배 체제 정비로 이어져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습니다.
고려 무신정권의 성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2세기에 들어 고려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문벌 귀족과 측근 세력 간에 정치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점차 치열해지기 시작했고 정치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이러한 때에 평소 문신들만 우대받는 것이 불만이었던 무신들은 '정중부', '이의방' 등을 중심으로 정변을 일으켜 다수의 문신들을 죽이고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을 보낸 후 자신들이 직접 명종을 임금으로 내세워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것을 무신정변이라고 부릅니다. 무인의 군웅 시대로서 무인들 사이에서도 세력 쟁탈이 심하였습니다. 무신정변 이후 무신들은 조정의 주요 관직을 모두 독점하고 부를 늘려갔습니다. 사병을 길러 서로 권력을 빼앗고 빼앗기는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이 때문에 중앙 정부의 통제력은 갈수록 약화하였고 백성들에 대한 수탈도 심해져 여러 차례 산발적인 봉기도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봉기들은 지배 체제에 대한 반발이 근본적인 이유이나 각 지방의 농민 및 노비의 반란이란 형태를 띠고 일어났습니다. 무신들의 지배는 20여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고려 사회는 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장군 최충헌의 등장은 무인 집권의 진전에 있어서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최충헌'과 그의 동생 '최충수'가 이의민을 살해하여 정권을 독점한 사건입니다. 최 씨 정권의 기초는 그의 아들 '최우'에게까지 이르러 더욱 강화되었고 무인 정권의 기구가 정비되었습니다.
고려의 농민과 노비의 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고려 의종 때의 사치와 향락은 국가 재정을 바닥 치게 했으며 이는 농민 수탈의 강화를 초래합니다. 이에 도탄에 빠진 농민들은 지배 체제의 문란과 무신들의 하극상 풍조에 자극되어 신분 해방과 지배층의 압박 및 수탈에 항거하기 위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릅니다. 12세기 초부터 집단적인 도적이 되어 여기저기서 각지를 소란하게 하던 유민들은 무신정변 전후로 전국 도처에서 성난 벌떼처럼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초기의 반란은 대체로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으로 지방관이나 향리들의 억압에 반항하여 농민이나 군인 혹은 노비들이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부당한 압박의 제거와 신분 해방 등이었으나 개별적인 요구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사미','효심'의 난에서부터 반란군은 연합 전선을 펴며 일련의 지속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반란군들은 그들끼리 합세하여 공동 전선을 펼쳤습니다. 경상도 일대에서는 서로 밀접한 연락을 가진 반란군의 연합 전선이 이루어지면서 무려 10여년간 세력을 떨쳤습니다. 이러한 반란은 지방뿐 아니라 수도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만적의 난'은 신분 해방은 물론 더 나아가 정권 탈취가 주목적이었습니다. 이들 반란은 최충헌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이 반란군은 고대적인 유산을 청산하려는 사회적인 움직임이자 고려의 신분 질서의 동요를 말하여 줌으로써 그 의미가 크며 그 후 정부 시책에도 반영되었습니다.
고려 신진사대부의 성장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무인 정권으로 인해 귀족정치가 붕괴하고 이후에 새로운 관료층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들은 학문적인 교양을 갖추었으며 정치 실무에서 능한 '사대부'였습니다. 이들의 사회적 진출은 고려의 정치적 대세를 변화시켰습니다. 권문세가들의 세력은 원나라의 강대한 세력을 뒷받침으로 한 것이었으나 원이 점차 쇠퇴하고 북방으로 쫓겨나는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시기에 즉위한 공민왕은 대외적으로는 반원 정치, 대내적으로는 권문세가의 억압이라는 두 가지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하여 국정을 관할하게 하고 권문 출신을 축출하며 문벌이 변변치 못한 사람을 등용하였습니다. 또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가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였습니다. 이러한 개혁은 권문세가의 반대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으나 신진사대부의 진출을 용이하게 하였습니다. 고려 후기에는 농업 생산력도 꾸준히 발전하였습니다. 원나라와 전쟁 중에 고려의 독자적인 의술이 발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인구가 증가하였으며, 그 결과 집약적 농업이 가능해졌습니다. 이러한 때에 중국으로부터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하는 농업 기술이 전해 내려오면서 휴한을 극복하고 한 토지에서 해마다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결과 농업 생산력이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오늘은 보다 자세한 고려에 대한 지식을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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