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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후삼국시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by 다인ING 2022.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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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는 골품제를 기반으로 하는 신라가 붕괴하고 그 속에서 호족 출신인 왕건이 등장하여 고려를 세우고 그 고려가 점차 봉건적인 귀족 국가로 확립되는 시기였습니다. 중국에서도 당나라가 망하고 혼란기가 송나라에 의해 수습 및 통일되면서 한 문화가 복구되어 가는 시기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북방 민족이 재등장하면서 그 세력이 남방에 미치던 때였습니다. 성당 문화가 들어오면서 통일신라의 문화가 극성기에 달했고 그것을 끝으로 신라는 당의 쇠퇴와 거의 때를 같이 하여 지방의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결국 붕괴하였습니다. 신라는 후삼국 시대가 도래하면서 고려 왕조로 재정비되어 갔습니다. 특히 이 시기는 중국의 간섭이 없는 독자적인 좌절과 흥기를 반복하면서 고대 국가가 붕괴하는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때였으며 외부 도전과 압력 때문이 아닌 내부적인 승화 과정이 촉진되었습니다. 시기로 보면 후삼국 시대는 통일신라 시대에 지방의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던 시대입니다. 신라의 비장 견훤이 서남부의 무진주를 장악하고 개국공을 칭한 후부터 고려의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킬 때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며 후백제의 견훤이 처음 왕을 선포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앞선 신라, 고구려, 백제가 대립하던 시기를 삼국시대라고 칭하고 있으므로 그때와 구분하기 위해 이 시기를 후삼국이라고 부릅니다. 

 

신라는 통일 이후 안정적인 사회를 유지하며 진골 귀족의 힘을 통제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8세기부터 소수의 귀족에게 권력이 집중되기 시작하면서 진골 귀족들 간에 분열이 시작되었습니다. 계속된 왕위 다툼으로 인해 왕권이 흔들리게 되었고 정부의 지방 통제력도 약화하면서 지방의 호족들도 성장하였습니다. 후삼국 시대는 이러한 강한 영향력을 가진 호족들이 중앙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후삼국 통일 이후 고려 태조가 지방 호족을 경계하며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들을 펼친 배경이 됩니다. 

 

신라의 개혁이 요구되는 시기에 신라에는 최치원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당나라에서 유학 후 귀국하였고 '시독' 겸 한림학사가 되었으나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하며 태산의 태수를 지냈습니다. 나라의 멸망을 앞당긴 진성 대왕은 반란군과 호족 세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인재들에게 개혁안을 올리라고 독촉하였습니다. 최지원은 시무 10조를 진성 대왕에게 올리고 '아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귀족들의 거센 반발로 인하여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하고 각지를 유랑하다가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습니다. 곧 이와 함께 신라는 종말에 점차 가까워져 갔습니다. 

 

견훤은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하고 자신의 존재를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순행을 떠났습니다. 후백제의 견훤은 완산의 세력가로서 그 주에 근거하여 스스로 후백제라 칭하였고 완산주 주민들이 크게 환영하였습니다. 무주의 동남쪽의 군과 현이 항복하여 소속되고 이어 서라벌 서남쪽의 주현을 공격하였습니다. 완산주에서 견훤은 옛 백제 의자왕의 울분을 씻겠다는 뜻을 내보였습니다. 이때 견훤은 백제왕을 칭하였고 연호를 '정개'라고 정하였으며 자신이 세운 나라의 제도와 관직을 정비하고 중국 강남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맺었습니다. 

 

궁예는 죽주 기훤의 부하가 되었다가 멸시받고 빠져나와 북원 양길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궁예는 양길의 신임을 받아 군사를 거느리고 지금의 예천, 영월, 울진 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그 이후 여세를 몰아 강원도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궁예의 세력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궁예는 더 이상 양길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이때부터 사실상 후고구려의 건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궁예는 당시 송악의 호족이었던 왕건 아버지의 투항을 받았습니다. 궁예는 왕건을 철원군 태수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는 왕건의 도움으로 경기 북부지역과 서해안 일대를 점령했습니다. 이후 송악을 후고구려의 수도로 삼고 왕건에게 양주와 청주 등 30여개의 성을 정벌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왕건은 신라의 최고 관직인 '아찬'의 벼슬까지 받았습니다. 양길이 궁예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여 그를 칠 것을 모의하였으나 패했고 궁예는 양길의 세력까지 흡수하여 더욱 강성해졌습니다. 궁예는 강력한 왕권을 꿈꾸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신하들이 강한 왕권을 꿈꾸는 궁예의 말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궁예는 고구려계 호족들을 견제하기 여러 왕권 강화정책을 펴나갔고 왕권에 조금이라도 도전할 낌새가 보이면 가차 없이 처단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신하들의 반발이 심했고 결국 그를 따르던 장군들마저 궁예를 배신해 나라를 잃고 말았습니다. 궁예가 축출되고 왕건이 뒤를 이어 북방의 왕조로 추대되었습니다. 왕건은 즉위와 함께 국호를 고려라 칭하고 연호를 천수로 정하여 송악에 천도하였고 이것이 뒷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건국이었습니다. 후백제와는 쉴 새 없는 교전 상태를 지속하였고 큰 두 번의 전투도 치르게 되지만 두 나라는 유사한 세력 균형을 계속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후백제는 내부 균열로 서서히 분열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후백제의 국내 정세는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이 지속되었고 견훤의 아들이 금산사에 유폐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완전히 분열되었습니다. 명목만 유지하던 신라의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하였습니다. 태조는 이로써 신라의 전통과 권위의 계승자의 지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고 견훤을 앞세워 후백제까지 멸망시켰습니다.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통일왕조를 세우는 데 성공한 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여 북진정책을 통해 영토를 넓히고 신라가 지니는 전통적인 권위를 원용하려 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 경순왕을 사심관에 임명하고 신라의 지배층을 흡수 및 회유하였습니다. 통일 후 호족들과 통혼하여 의제 가족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들과 타협하거나 연합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러 호족의 존재는 태조 왕건의 적지 않은 우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태조 왕건은 북진정책을 펴서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거란을 경계하였으며 국토 수복과 신세력의 육성을 도모하여 서경 개척에 노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장군 유금필이 동북 지방을 수복게 하여 영토를 확장하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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