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의 역사
10세기 초 신라에서는 왕위 쟁탈전이 지속해서 발생하여 정치가 혼란해졌고 전국 각지에서는 조세 수취에 반발하여 농민봉기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지방 호족들이 신라 조정으로부터 독립하여 각자 자신의 세력의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서 신라 진골 왕족이었던 궁예와 신라의 장수였던 견훤이 강한 세력을 구축하였습니다. 견훤이 먼저 후백제를 자칭했고 곧 궁예가 고려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신라, 후고구려, 후백제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가 바로 후삼국 시대입니다. 하지만 이후 궁예가 실정을 거듭하여 민심을 잃었고 통일신라 송악 지방의 유망한 신라 호족이었던 왕건이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임금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고 했고 송악으로 옮겼습니다. 왕건의 측근과 왕건 본인이 고구려의 혈통이었기 때문에 국호로 고려를 사용하여 고구려의 후손을 자처하는 것은 왕건과 궁예의 공통점이었습니다. 그 시기 발해가 요나라의 침략을 받고 멸망하였고 왕건은 발해의 왕족을 비롯한 유민을 받아들여 세력을 키웠습니다. 이는 왕건의 정치적, 군사적 기반을 확고히 하고 고구려에 대한 계승의식을 확고히 하면서 신라 호족으로서의 성격 역시 뚜렷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외정책에서는 궁예와 다르게 친신라 정책을 썼습니다. 이는 신라의 전통과 권위의 계승자가 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왕건은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 금성 북 50리의 땅에 '신광진'을 설치하여 고려의 군사를 주둔하게 하였습니다. 결국 신라 경순왕은 신라의 고려 귀순을 결정했고 신라 군사와 함께 후백제를 패망시킴으로써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건국된 고려는 왕건의 즉위 후, 이성계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한반도에 오랫동안 존재했던 국가입니다. 고려는 '외왕내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한 국가이며 고려의 군주는 생전에는 황제라 칭했으나 붕어 이후 시호는 대왕으로 올렸습니다. 태조 이후 정종과 혜종을 거쳐 광종이 즉위하였으며 광종은 황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 등을 시행하고 공신과 호족 세력을 세거하여 황권을 강화하였습니다. 이어 경종 때는 전시과 제도를 실시하였고 성종은 지배 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수도 개경의 외항인 벽란도에서 송나라, 왜, 아라비아, 페르시아 등지의 상인들과 무역했습니다. 송나라와는 우방 관계를 유지하였지만 금나라, 요나라 등의 나라와는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고려, 요, 북송 / 고려, 금, 남송 3강 구도의 팽팽한 세력균형을 유지하였습니다. 12세기에 들어 고려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문벌귀족과 측근 세력 간에 정치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치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로 무신정변이 일어났고 최 씨 무신정권이 집권 되었습니다. 유민들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도처에서 정부에 반항하였습니다. 13세기 들어 30여년에 걸친 몽골제국의 침략으로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공민왕의 개혁 실패와 내우외환에 이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기점으로 고려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성계는 결국 공양왕을 폐위시켰고 고려는 조선으로 바뀌면서 공식적으로 멸망하였습니다.
고려의 통치기구
고려의 성립은 고대 사회에서 중세사회로 이행하는 한국 역사의 내재적 발전을 의미함으로써 신라를 잇는 새로운 통일왕조로서 역사적 의의를 지닙니다. 통일신라 말기의 6두품 출신 지식인과 신라의 지방 호족 출신을 중심으로 성립한 고려는 골품 제도 위주의 신라시대보다 더 개방적이고 통치 체제도 과거제를 실시하는 등 효율성과 합리성이 강화되었습니다. 특히 사상적으로 유교의 정치이념을 신라 때보다 더욱 수용하여 고대적 성격을 벗어났습니다. 고려는 제국의 제도를 사용하였습니다. 태조와 광종은 연호를 세워 대외적으로도 황제를 칭했습니다. 다른 고려의 군주들 또한 자신을 스스로 '짐'이라고 칭하고 수도를 황성, 군주의 존칭을 폐하, 초기 보위를 계승할 임금의 장남을 정윤 또는 태자라고 불렀습니다. 군주의 어머니는 태후, 군주의 명령은 조와 칙으로 불렀습니다. 고려 시대는 외적의 침입이 유달리 많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끊임없는 항쟁으로 이를 극복해 냈습니다. 12세기 후반 무신들이 일으킨 무신정변은 종전의 문신 귀족 중심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신분이 낮은 사람도 정치적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무신 집권기와 원 간섭기를 지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 새롭게 성장한 신진사대부를 중심으로 성리학이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민본적인 정치 이념이 성립되고 이에 따른 사회 개혁이 진전되었습니다.
고려의 문벌귀족 사회의 성립
성종 이후 중앙집권 국가 체제가 확립되면서 중앙에서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신라 말기의 지방 호족 출신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 관직자들을 배출하였고 문벌 귀족이라고 불렸습니다. 문벌 귀족들은 관직에 따라 땅을 받고 자손에게 세습이 허용되는 공음전과 관직에 따라 혜택을 받으며 자기들끼리 혼인 관계를 맺는 폐쇄적인 통혼권을 형성하였고 때로는 황실과 혼인을 맺어 외척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치권력과 경제력을 독점하여 정국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내정에서 고려 왕조가 건국한 이래 오랜 숙제이던 황권의 강화는 역대 황제의 일관된 노력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확고하게 잡히기는 어려웠고 신하에 의해 왕이 폐위되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습니다.
고려의 대외 문제
내정 이외에도 고려는 대외적으로도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었습니다. 당시 고려는 미묘하고도 복잡한 대외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중국에는 송나라가 자리 잡고 있었고 고려는 송나라와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통해 송나라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북방 민족인 거란이 세운 요나라가 강성해지면서 동아시아 정세에 파탄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거란은 고려의 친송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두 나라의 외교 관계를 단절시켜 고려를 요나라의 영향권 아래에 두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거란은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략하여 무력으로 굴복시키려고 하였지만 '서희'의 외교 수완으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이때 고려에서는 형식적으로 거란과 우호 관계를 맺고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교하는 척하며 거란에 대하여 성의 있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으며 송나라와의 친선관계를 계속 유지하였습니다. 이러한 외교적 모순을 빌미로 거란은 지속해서 고려를 침략하지만 고려 군의 분전으로 요 군의 기세는 꺾였고 그 배경에는 강감찬의 귀주대첩이 있습니다. 결국 요나라는 고려에 패하게 되고 고려, 송나라, 거란 이 세 나라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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