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전기, 중기, 후기로 나뉘는데 오늘은 조선의 전기에 대한 내용입니다.
고려 말의 시기에는 '철령위'문제로 밖으로는 명나라와 안으로는 친원파, 친명파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따라 고려는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최영'을 중심으로 요동 정벌군을 편성하였습니다. 우군 도통사를 맡았던 이성계는 좌군 도통사 조민수와 논의하여 당시 평양에 있던 최영 장군에 회군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성계가 직접 조민수와 개경으로 군사를 돌려 회군을 강행했고 이 사건이 조선의 건국을 있게 한 위화도 회군입니다. 고려의 무신이었던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정권을 잡고 창왕, 공양왕 등을 왕위에 올렸다가 폐위시키는 등 정권, 군권을 장악하고 전제 개혁을 단행하는 등 경제적인 실권까지 장악했습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하고 이성계는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개국하여 태조가 됩니다. 태조는 국명을 고조선에서 조선을 선택해 조선으로 고치고 민심이 좋지 않았던 개경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천도하여 여러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태조는 재위 기간에 개국공신들을 지지하면서 왕조의 기틀을 확립하였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여러 왕자의 난이 있었습니다. 태조는 8번째이자 막내였던 '의안대군'을 왕세자로 삼았으나 개국 당시 많은 공을 세운 5번째 왕자 이방원은 이에 불만을 품고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방원은 사병을 동원해 난을 일으켜 '의안대군', '무안 대군' 그리고 왕세자를 지지했던 정도전과 그 일파까지 모두 살해했습니다. 당시 생존해 있던 태조의 아들 중 둘째 아들인 '영안대군'에게 왕세자 자리를 양보하였고 그렇게 '영안대군'은 정종이 됩니다. 그러나 4번째 왕자 '희안대군'은 1차 왕자의 난에서 불만을 품은 '박포와' 공모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이방원의 군사와 맞붙어 패전하게 되고 '희안대군' 방간은 유배되고 '박포'는 처형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종은 이방원을 왕세자로 삼고 양위하여 이방원은 태종이 됩니다.
2번의 왕자의 난에서 승리한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관료 제도를 정비했습니다. 태종은 사병을 없애고 양전 사업과 호구 조사를 통해 조세 제도와 호적 제도를 개혁했습니다. '의정부'를 설치하고 왕실 외척과 공신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해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해 정치를 안정시켰습니다. 그리고 언론 기관인 '사관원'을 독립시켜 신하들을 견제하게 했습니다. 지방제도인 8도 정책도 태종 때부터 자리 잡았습니다.
세종대왕은 이방원에 의해 나라의 기반이 다져진 안정적인 상태로 즉위했습니다. 세종대왕은 군사, 학문, 과학, 문화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했습니다. 정치도 점차 안정되어 갔습니다. 이 시기에는 성리학이 국가 이념으로 정착했고 고려 말에 들어온 면화가 보급되었습니다. 국방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화포 제작 및 조선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북방 지역인 '4군 6진'을 개척하여 국경선을 확정했습니다. 대마도를 정벌하여 일본 왜구의 침략을 방지하고 궁 안에 정책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을 진흥시켰습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금속활자와 측우기를 개량하였습니다.
개량된 금속활자로 여러 가지 책을 발행하기도 하였고 의서인 '향약집성방'을 통해서 의료 관계 개선이 집중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세종대왕의 맏아들이었던 문종은 짧은 생 뒤에 서거하고 문종의 아들 단종이 뒤를 이었지만 어린 나에게 국사를 보는 것이 쉽지 않았던 단종 대신 병권을 잡은 김종서가 국사를 봤으나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정 대신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세조가 되었습니다. 세조는 세종이 채택한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태종이 주창하였던 6조 직계제를 사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신하가 숙청당하고 집현전은 폐지되었습니다. 세조는 태종처럼 신권을 제한한 왕권 강화를 위해 호패법을 부활시키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성종은 세조의 손자였는데 개국 이후 처음으로 문물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유학을 장려하고 폐지되었던 집현전의 기능을 담당한 홍문관을 설치함으로써 수많은 역사서를 편찬했습니다. 세조 때부터 이어져 온 법전 편찬 사업이었던 '경국대전'의 편찬도 이때 완성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성종은 조선 사회의 기본 통치 방향과 이념을 제시했습니다. 또한 공신 세력이었던 훈구파를 경계하기 위해 영남의 사림파를 등용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습니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연산군의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대량 숙청되었으나 사림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중종반정을 통해 중앙 정계에 많이 진출했습니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또 대부분 숙청되었고 인종 때 잠시 등용되었으나 명종 때 일어난 을사사화로 훈구파 및 외척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선조 때 비로소 사림파는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을 실권을 잡게 됩니다. 이때부터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붕당 정치가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외교면에서는 특히 명에 대해서는 사대 정책을 썼습니다. 이성계는 국호를 정할 때에서도 내부적으로 국호를 정했으나 명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화령'과 '조선' 중에서 명의 승인을 받는 일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조공, 회사의 형식을 취한 국가 간의 무역이 행해졌습니다. 이러한 사대 정책은 원나라를 멸망시킨 명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한 외교였습니다. 조선은 명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제후국으로서 예를 갖췄습니다. 정식 국왕으로 책봉된 이후도 명나라와의 친선을 위해 명나라에 형식으로 관리를 파견해서 책봉 승인을 받았습니다. 조선 개국 초에는 명나라를 침공하는 고려군의 총사령관이 이성계였고 조선 건국 이후에도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강행하려 했던 문제로 이성계는 명나라로부터 조선의 국왕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왕을 국왕이라고 처음 불렀을 때는 태종 때였습니다. 또 다른 주변국인 일본과 여진에게는 교린정책을 취했습니다. 조선은 건국 초기에 여진족의 본거지를 침략하여 조선의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일부 여진족들은 조선과 사대관계를 맺었습니다. 또한 조선은 왜구의 본거지인 일본의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였습니다. 사대 정책과 교린정책은 조선의 기본적인 대외정책으로서 계속 계승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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