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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삼국시대> 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by 다인ING 2022.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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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대는 기원전 1세기부터 7세기까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전한 시기를 말합니다.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으로 백제, 고구려가 차례로 멸망하면서 한반도 중남부에는 통일신라 북부에는 발해가 들어서 남북국시대로 넘어갑니다. 기원전 57년 신라가 소백산맥 남동쪽에, 고구려가 기원전 37년 압록강 유역에 세워졌습니다. 기원전 18에는 고구려 추모 성왕의 아들 온조가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백제를 건국했으며 수로가 낙동강 중하류 유역에서 가야를 세웠습니다. 주변국들로는 부여, 옥저, 동예, 우산국, 탐라국 등이 있었습니다. 이때를 기술한 역사서로 삼국사기와 삼국사절요, 삼국유사 등이 있습니다. 

 

삼국은 고조선 사회의 외곽에서 각기 독자적으로 성립하였고, 4세기 중반 이후 서로 국경을 접하게 되기 전까지는 상당 기간 상호 간의 깊은 교섭이 없이 발전해 나갔습니다. 그에 따라 삼국은 각각 다른 개성 있는 정치조직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삼국 초기의 정치조직에서는 당대의 역사적 조건으로 인한 일정한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체제'입니다. 고구려의 5부, 신라의 6부, 백제의 이주민 집단으로서 구성된 부 등은 원래 부족이나 소국의 성격을 지닌 단위 정치제 였습니다. 이들은 삼국이 성립될 때 연맹체를 형성하여 삼국 건국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삼국이 확대되어 나감에 따라 다른 피정복 지역의 지배층 일부가 이들 부의 주민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삼국 초기 각부는 중앙 정부에 대외적인 외교, 군사, 무역권 등은 빼앗겼으나, 부 내부에서는 상당한 자치권을 행사하였습니다. 또한 부 내부에도 부의 통제를 받으면서 일정하게 자치권을 행사하는, ‘부내부’라고 불리는 작은 하위 집단이 존재였습니다. 고구려의 경우 연나부 내에 그러한 집단이 네 개 존재하였고, 신라의 한지부 내에서도 그러한 집단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삼국 초기에 흡수된 피정복 지역의 주민은 병합될 당시의 소국 또는 읍락 단위로 각각 중앙정부에 복속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치를 행하며 중앙정부에 공납하고 군사적으로 협력하였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삼국 초기 통치구조의 기본적인 틀은 자치적인 여러 집단을 누층 적으로 통합하여 지배, 예속, 관계 화한 것입니다. 당시 각부의 귀족들은 자기 관원을 두었고 상당한 자치력을 지닌 세력 기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은 초월적인 권력자라기보다는 그러한 귀족 가운데 대표적으로 유력한 존재였습니다. 각부의 귀족으로 구성된 회의체가 중요한 권능을 지녀 왕국의 중대사를 결정하고 가끔은 이 귀족회의에서 왕을 폐위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는 일을 결정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귀족회의는 왕권의 강화에 따라 그 권력이 약화하기도 하였으나 삼국 말기까지 존재하였습니다. 이것이 삼국 초기의 정치구조 모습입니다. 

 

삼국은 중기에 들어서면서 삼국은 모두 여러 차례의 진통을 겪었고 부족 연맹체 적인 사회조직을 청산하고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부족 연맹체의 맹주는 전제적인 왕권으로 전환 및 강화되어 왕권의 확립,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이루어지고 율령격식이 반포되어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가 확립되었습니다. 원래의 대소 부족장들은 그들의 독립성을 상실하고 중앙과 지방의 관료 조직 속에 흡수되어 귀족화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귀족사회의 실태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은 신라의 골품제입니다. 골품에는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등이 있었으며 진골 중에서는 고구려의 고추가와 비슷한 갈문왕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삼국은 과거 다원적인 조직을 청산하고 왕을 중심으로 한 일원화된 관등 체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관직은 신분에 따라 한계가 있었습니다. 중앙의 권력은 지방에까지 미쳐서 행정적인 구획이 설정되었습니다. 과거에 부족들이 웅거하던 지역에는 성을 쌓고 이것을 군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장관을 나라마다 다르게 칭했으나 일반적으로 성주라고 했습니다. 뒤에는 여러 성을 통과하는 행정구획이 생겼습니다. 고대국가의 성장에 따라 전국의 모든 토지는 왕토요, 모든 주민은 신민이라는 사상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 공이 있는 장군들에게는 식읍이나 녹읍과 같은 명목으로 많은 토지와 포로들이 분배되었으며 그 결과 토지와 노예가 사유화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일정한 지방에 강제로 이동되어서 집단적인 거주를 하는 부곡과 같은 천민 집단도 있었습니다. 신분적으로 양인인 농민들은 자기들의 자영지를 경작하고 있었고 국가는 이들은 직접 파악하고 있었으며 조세를 부과거나 노동력을 수취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토지보다도 인간의 노동력에 관심이 컸기 때문에 자영 농민은 때로는 용민으로 전락하고 또 노예가 되기도 했습니다. 

 

삼국 후기로 접어들면서 삼국 관계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는 대륙의 정세 변동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은 왕위 계승 분쟁의 여파로 귀족 간의 내분에 시달리고 있던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고 에 따라 한강 하류 지역은 백제가 상류 지역은 신라가 차지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이어 북중국의 북제의 군사적인 압력과 몽골고원의 신흥 유목민 국가인 돌궐의 적극적인 공격에까지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안팎의 위기를 맞아 고구려의 귀족들은 대내적으로는 그들 간의 분쟁을 수습하고 귀족 연립 정권 체제를 성립시켰습니다. 이후 백제와 신라 간에는 해를 이은 상쟁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6세기 종반 고구려가 돌궐의 공세를 저지한 후 재차 남으로 공격을 이어 감에 따라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이 재개되었습니다. 이에 삼국은 각각 상쟁을 벌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영역 국가체제를 구축한 삼국 사이에 더 많은 토지와 인민을 확보하려는 전쟁이 계속 이어진 것입니다. 삼국 간의 장기간 전쟁은 사회분화를 더욱 촉진했습니다. 전쟁을 통해 빈번히 전쟁에 동원된 소농민 층의 경우, 급박한 군사 정세에 따라 때로는 노인도 징발되었으며 복무 기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평상시에 노역에도 동원되었으며 그러한 상황에서 고리대가 성행하였고 일부 소농민 층은 몰락해 갔습니다. 영역 국가 체제가 자리 잡아가고 사회 분화가 진전되던 삼국은 촌락의 공동체적 관계가 급속히 해체되고 지역 간의 주민교류가 활발해졌습니다. 지방의 유력가나 몰락한 농민의 일부는 잦은 전쟁에 따라 늘어난 병력 수요와 신속한 동원력의 필요에 따라 행해진 모병에 응하기도 하고 귀족의 휘하에 몸을 의탁하여 입신을 모색하기도 하며 수도로 올라와 생존과 출세를 도모하였습니다. 유력한 귀족은 정치적, 군사적 필요에 따라 이들을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세력 확대를 도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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